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 로맨틱한 모험가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처럼, 세계를 탐험하는 어린이 탐방 기자 땡땡이 된 것처럼 전 세계를 누벼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닌 각국의 부동산 유산의 트렌드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몰랐던, 알고도 지나쳤던 고귀한 오라를 발견할 수 있다.
세계를 감동시킨 탁월한 보편적 가치
한국의 산사
지난해 6월 30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개최된 제42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북 영주의 부석사, 경북 안동의 봉정사, 충북 보은의 법주사, 충남 공주의 마곡사, 전남 순천의 선암사, 전남 해남의 대흥사 등 7곳을 한데 묶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7~9세기 창건 이후 지금까지 불교의 신앙•수도•생활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산사는 세계유산의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종교 공간을 뛰어 넘는 우리 산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란 과연 무엇일까. 7곳은 하나같이 산기슭 계류를 끼고 주변 환경을 경계로 삼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찰 내 법당•불상•불화•단청문양 등은 당대 최정예의 건축 미학과 예술성이 집결된 귀한 보물들이 대부분이다. 자연의 이치, 삼라만상의 섭리에 순응해온 성스런 공간인 동시에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한국미의 정수를 지키고 가꿔온 우리의 산사. 유서 깊은 박물관에 가까운 한국의 산지 승원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18년 세계유산 등재 #종교 공간을 넘어선 문화유산의 보고
지붕 없는 세계 건축 박물관
고랑서
중국 하문(廈門, 샤먼)에는 섬 하나가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데가 있다. 중국 5대 경제특구 중 한 곳이자, 현지인들 사이에서 가장 깨끗하고 살기 좋기로 소문난 고랑서(鼓浪屿, 구랑위)가 그곳. 고랑서에 가기 위해선 샤먼에서 페리를 약 20분 정도 타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중국이 다른 나라에 빌려준 섬이었던 고랑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14개 국가의 식민지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섬 곳곳에는 중국과 유럽풍 양식이 혼재된 수많은 형태의 건축물이 빼곡히 자리하게 되었다. 중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다국적 양상을 띠는 역사 건축물, 자연 관광지 등을 간직한 고랑서는 2017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섬 하나가 통째로 세계유산 #동서양이 혼재된 다국적 건축물
사랑의 신이 살았던 고대 도시
아프로디시아스
터키 파묵칼레에서 약 100km 떨어진 고대 도시, 아프로디시아스는 기원후 7세기까지 번성하였으나 7세기 대지진을 겪으며 쇠퇴하기 시작해 15세기 티무르의 공격 때 완전히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 중심부에는 기원전 3세기쯤 건립된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자리 잡고 있으며, 도시 인구의 10분의 1을 수용할 수 있는 1만 명 규모의 하드리아누스 원형 극장, 오늘날의 시장과 같은 아고라 등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중요한 유물들은 이 유적지 입구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박물관 규모가 소박하기 때문에 기타 중요한 유물과 새롭게 발견된 유물들은 건물 밖 정원에 보관돼 있다.
#파묵칼레의 숨겨진 명소 #고대 원형 경기장과 원형 극장
16개 호수에 어린 영롱한 산빛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니 플래닛>이 ‘잉글랜드에서 걷기의 심장과 영혼으로 불리는 곳’이라고 감탄한 국립공원이다. 영국 북서부의 쿰브리아주에 위치한 이곳은 영국 내 가장 큰 호수인 원더미어를 비롯해 16개의 청아한 호수, 깊은 산, 수려한 계곡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을 선사한다. 실제로 과거 워즈워드, 키츠, 셀리, 러스킨을 포함한 수많은 문장가와 사상가들이 이곳의 그윽한 산빛과 영롱한 물빛에 취해 거닐며 창작의 영감을 퍼올렸다. 영국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도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왕실이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로 언급해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맨체스터에서 약 130km 거리에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면적은 약 2,300km2. 1951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2017년에는 영국 내 국립공원 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호수가 많은 산지 국립공원 #시인 워즈워드의 산책길
1500년 전 캄보디아 첸라 왕국의 수도
이샤나푸라
삼보르 프레이 쿡 템플 존이 자리한 ‘이샤나푸라’ 지역은 6~7세기에 걸쳐 번창한 첸라 제국의 수도였다. 프놈펜과 시엠레아프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곳은 당시 강•운하•천연제방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뛰어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문화•종교의 중심지로도 큰 번영을 누렸다. 템플 존 안에는 100여 개가 넘는 고대 사원이 있는데, 동남아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대 인도 팔각 사원의 건축 양식’을 한 사원도 10개나 남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곳 삼보르 프레이 쿡 템플 존의 것과 일치하는 고대 팔각 사원을 찾아볼 수 없어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힌두교도상학의 영향을 받아 세밀하고 정교하게 빚은 사원의 외부 장식, 사암으로 만든 동상•건물 기둥•페디먼트 등의 장식적 요소와 사원 입구의 역동적인 사자상에도 ‘삼보르 프레이 쿡’ 템플 존만의 예술적 특징이 선명하게 배어 있다.
#고대 인도 팔각 사원의 건축 양식 #시간이 멈춘 듯한 고대 도시
20세기 미래 건축의 실험장
에리트레아 아스마라
19세기 후반 동아프리카 국가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삼은 이탈리아는 해발 2,300m에 위치한 도시 아스마라를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당시 무솔리니는 이곳을 제2의 로마제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불태웠고 그 결과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이 대거 몰려와 아스마라는 매우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현대 건축 디자인의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항공기를 본뜬 주유소 피아트 탈리에로다. 사무동 양쪽으로 비행기 날개 모양의 지붕을 무려 15m나 낸 것인데, 지지대 하나 없이 오직 설계의 힘만으로 지붕을 얹은 그야말로 미래파 건축의 대명사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형태 그대로 온전하다고. 이 외에도 전자기기 회로판 모양의 영화관 시네마 임페로, 신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성모교회,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접목한 볼링장 등 전체 건물 중 무려 400여 개가 이탈리아풍 양식을 띠고 있다. 20세기 전후의 현대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 전체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아스마라가 처음이다.
#20세기 전후 현대 건축의 실험장 #항공기를 본뜬 피아트 탈리에로
거대한 프레스코화에 담긴 중세 역사
스비야시스크 성모승천 대성당
1550년대, 이반 4세가 요새 도시로 지은 러시아 중동부의 스비야시스크. 이곳에 있는 성모 승천 대성당과 수도원이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새로이 정복한 이슬람 문화권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이반 4세가 기독교 정교 양식에 이슬람 양식을 더해 지은 건축물이 바로 성모 승천 대성당과 수도원이다. 해발 고도 80여m의 지점에 지어 마을 어디에서나 위엄 가득한 대성당의 모습을 올려다볼 수 있다. 벽, 천장, 기둥할 것 없이 대성당 내부를 빼곡하게 덮은 1,080m2 규모의 프레스코화가 특히 유명하다. 이반 4세는 성서의 주요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를 교재 삼아 외부 민족들에게 정교의 힘과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후 18세기 초반엔 근대화에 몰두한 표트르 1세에 의해 대성당 외관이 바로크 양식으로 전면 개편되었다. 이처럼 성모 승천 대성당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러시아 역사, 건축, 문화, 종교의 면모를 두루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사료다.
#보기 드문 이반 4세 시대의 건축물 #중세 러시아의 역사, 문화, 종교가 한자리에